제 718 호 [만평] 다함께 동행
[만평] 다함께 동행_김다엘 기자
제 718 호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 / 2022 18세기 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바꾼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 이야기! 영화 제목인 Delicious는 <매우 맛있는, 매우 향긋한, (감각적으로) 매우 기분 좋은>이란 사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 속에서는 'Delicious'가 주인공이 개발한 감자를 베이스로 한 디저트 이름이기도 한데, 이 디저트를 맛본 하녀가 감탄으로 내뱉은 '딜리셔스'가 이 음식의 이름이 되어버렸고,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차린 식당의 이름이 된다. 혁명 바로 직전 1789년의 프랑스에서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요리하던 셰프 망스롱, 그가 모시던 샹포르 공작의 식탁 위에 새롭게 개발한 메뉴를 선보이자 바로 해고된다. 그 이후 요리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평범한 주막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중,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루이즈'라는 한 여성이 찾아온다. 영화의 배경인 18세기에는 귀족의 특권이 엄청났던 시기이다. 그래서 요리사의 음식을 먹고 음미하는 것 자체가 서민들은 누릴 수 없는 귀족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귀족의 어깨는 잔뜩 솟아있었고 셰프마저 기량을 펼칠 수 없는 시대였다. 현대에는 레스토랑에 간다면 메뉴에 있는 음식 중 하나를 골라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주 예전에는 귀족이 원하는 음식을 셰프가 요리해야 하는 문화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딜리셔스’라는 제목부터 왠지 맛있는 음식이 잔뜩 등장할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그렇진 않다. 영화는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전문 요리사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그 첫 시도의 레스토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포커스를 더욱 맞추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렵사리 열게 된 레스토랑은 망스롱의 훌륭한 요리 솜씨 덕분에 입소문까지 타면서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는다. 투박한 장소에서 하나씩 정리되며 아름다운 가게를 이루는 그 모습이, 그리고 보기만 해도 유기농 티가 팍팍 나는 요리들이 영화를 훨씬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또한,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고조된 감정과 긴장감도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다. 18세기 인물들의 복식을 비롯해 식기류, 정원, 자연경관과 같은 프랑스의 시골 풍경과 음식 등의 볼거리가 매우 풍부해서 좋은 영화이다. 음식과 관련된 질투와 권력으로 인한 복수도 볼 수 있는 등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 마지막에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다는 내용을 보여주면서 귀족들의 풍자가 더욱 희화화되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전의 프랑스 귀족 문화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귀족 문화를 소개하면서도 적당히 그들의 세계를 꼬집고 희화화하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요리 과정과 비주얼을 보며 어떻게 프렌치 레스토랑이 시작되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주어 볼거리가 풍부한 힐링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 <딜리셔스: 프렌치 레스토랑의 시작>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정소영 기자
제 718 호 유한한 영원
사람은 평생 삶을 영유하지 못한다. 진시황이 평생을 찾아 헤맨 불로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의 영원한 삶을 가능케 하는 것도 없으며, 인간 본연의 성질 또한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거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한 친구와의 이별을 겪다 보면 자신이 홀로 살아가는 것 같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살아가는 이유를 잊어버리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특히나 정의 전부를 다 내어주고 진심으로 대한 이와의 이별은 절대 잊지 못할 상처와 슬픔으로 남을 것이고 이 이별만큼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점이 있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지 못하므로 내 곁에 평생을 머물러 있지도 못하는 것이며 유한한 생명을 가졌기에 온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언제든 떠날 수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막연히 속상해하고 슬픔에 빠진 나날을 보내지만 말고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 만큼, 믿어준 만큼, 소중했던 만큼 그에 대한 인연으로 말끔히 보내주는 게 예의이며 자신한테도 더 이상의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잊을 수 있기에 보내주는 것이므로 그리움의 시간 속에서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것은 어떨까? 양시원 기자
제 717 호 [교수사설] 챗봇 시대, 우리의 소통력 문제
챗봇 시대, 우리의 소통력 문제 챗봇은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정보를 검색하여 질문에 답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하나이다. 규칙에 맞게 질문을 하면 썩 나쁘지 않은 정보를 꽤 괜찮은 문장으로 대답을 한다. 웬만한 보고서 하나는 거뜬히 써내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발전으로 얻은 성과물이 이 정도라고 하니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육자는 무슨 일을 하고, 또 학생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굳이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아도 챗봇이 척척 답을 내놓은 세상에서 교육자와 학생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한 사정이 이러하니 “대학에서 굳이 사고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사회에 잘 적응하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있다. 그 구체적인 항목 중에 가장 먼저 원활한 의사소통력을 손꼽는다. 원활한 의사소통력이란 무엇일까? 챗지피티(ChatGPT)에게 물었다. “소통력이 뭐예요?” 챗지피티는 이렇게 답했다. “소통력은 다른 사람들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 느낌, 의견을 듣고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설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통력은 일상적인 대화, 직장에서의 업무, 가족 관계,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상대방과의 원활한 대화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소통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물었다. “소통력을 기르는 방법이 뭐예요?” 챗지피티는 이 질문에 대해 주요한 방법이라며 여섯 가지 항목을 언급하였다. 항목과 설명까지 타당한 답을 내놓았는데, 항목만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명확하게 표현하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대화하기, 듣기 연습하기, 비판적 사고 기르기, 갈등 해결 방법 익히기.”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질문을 하면서 ‘인공지능 활용하기’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챗지피티가 답한 소통력을 기르는 방법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과 무관한 것들이었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항목을 위해 기존에 공개된 정보를 챗봇을 통해 활용할 수 있을 뿐, 나머지 항목은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번에는 “소통력 향상에 인공지능이 어떤 도움을 줄까요?”라고 물었더니 자연어 처리 기술을 이용한 챗봇을 이용하여 답변을 제공받는 것, 음성 인식 기술을 이용하는 것, 자동 번역 기술을 이용하는 것, 감정 분석 기술을 이용하는 것 등의 답을 내놓았다. 이 모두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종류에 대한 것이고, 소통력 향상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인식하여 내놓은 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글쓰기 교육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글쓰기를 할 때 하는 일은 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연구 내용을 숙지하고 그 내용을 잘 정리하여 나의 논리를 세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더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인하고자 할 때 챗봇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과정은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 그래서 ‘보고서를 써주는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과학의 이기를 잘 활용해도 되니, 이제 보고서 작성이나 글쓰기를 그다지 안 배워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회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회사에서 의사소통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력은 면접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얼른 챗봇에게 물어보고 답을 할 참도 주지 않고,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잠시만요.’ 하면서 상대를 기다리게 할 참도 주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활용하기 좋은 인공지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고 내가 부딪쳐야 한다. 혹시라도 보고서 작성법과 글쓰기 교육이 필요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 교육에서 ‘사고와 표현’이라는 의사소통력 관련 교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그 배움의 과정에서 우리의 사고가 자라고 소통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며 글을 쓰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고를 넓히고,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더욱 섬세한 분별력을 기르며,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사고력이 길러진다. 그러한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나의 소통력은 완성되는 것이다.
제 717 호 [영화로 세상 보기] 어느새 한 몸처럼, 현대인의 스마트폰 과의존을 돌아보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영화로 세상 보기] 어느새 한 몸처럼, 현대인의 스마트폰 과의존을 돌아보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2023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항상 스마트폰을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단순히 친구와 수다를 떨 때에도, 아니면 민감한 금융 문제를 다룰 때에도 이제는 전자기기가 없으면 오히려 불편한 수준이 됐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이러한 생활 양식을 가진 현대인에게 ‘스마트폰 과의존의 위험성’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회사원 ‘나미’는 퇴근 중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스마트폰을 잃어버린다. 이 스마트폰을 주운 ‘준영’은 나미의 스마트폰에 스파이웨어를 설치하고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나미의 신상정보를 모두 캐낸 뒤 그녀를 살인할 목적으로 나미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준영은 먼저 나미의 주변 인물들을 그녀의 곁에서 하나둘씩 제거하며 나미가 삶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의 내막을 알게 된 나미는 형사 지만과 협력하여 준영을 검거하는 데 성공하고, 그녀는 다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릴러 작품으로, 일본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시가 아키라의 추리소설 <スマホを落としただけなのに>를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단편영화 <착한, 사람들>로 영화계에 얼굴을 비춘 김태준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2023년 2월 17일 영화가 공개된 이후 대한민국을 포함해 총 18개국에서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인 호응을 받았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삶과 밀접함을 가지는 만큼, 사용에 경각심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사이코패스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준영과 같은 인물에게 본인의 분신인 핸드폰을 빼앗기게 된다면, 영화에서 연출한 것처럼 일상이 파국으로 치닫는 데에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결국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누구든 나미로 지목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현명한 스마트폰 이용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Don‘t put all your eggs in one basket)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일상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스마트폰을 이젠 잠시 꺼두고, 오프라인에서의 생활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을 감상하며 직접 느껴보자. 김상범 기자
제 717 호 [만평] 따뜻한 봄
[만평] 따뜻한 봄_김다엘 기자
제 717 호 따스함 속 나의 계절은?
제법 쌀쌀했던 3월의 추위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따뜻한 기온이 올라오는 4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추위가 꺾이고 따스함이 찾아오면 형형색색의 활기가 돋보이기 마련이다. 시들어 있던 나무와 꽂잎들이 다시 피어나고 학교는 새학기의 개강을 맞이해 신입생과 복학생 밎 재학생들로 다시금 북적이며 활기를 되찾아가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활기 속 이면에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 숨어있다. 철창에만 갇혀 지내던 새가 그 공간에서 풀려나게 되면 자유를 만끽하기에 앞서 높은 건물과 밤이 되면 켜지는 불빛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기에 제 비행 실력을 뽐내기 어렵다. 우리 슴우들도 이와 마찬가지 일거라 생각이 든다. 대학 입학 초반에는 익숙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본 고향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뿐더러 완전히 새로운 사람관계를 맺어가는 어색함이라는 공간 속에서 지내는 것 또한 힘에 부칠 것이다. 캠퍼스의 낭만에 푹 젖어 들어 들뜨면서도 한편으로는 학교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한 수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학기 초를 보내고 있는 학우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현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새하얀 의자에 홀로 걸터앉은 외로운 새 한마리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로움 속에서 하염없이 어느 방향의 길로 가야 할지 헤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자신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쉽게 보이는 것도 놓칠 수 있으니 여유를 갖고 따스함에 몸을 맡겨 나만의 계절을 서서히 음미해본다면 점차 적응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상명 학우 여러분들도 내 계절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각자의 계절은 어떤지 서로 얘기하며 진정한 우정을 쌓는 것, 이렇게 쌓아가는 과정에서 멋진 인연을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믿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제 716 호 나도 모르게 하는 차별 '선량한 차별주의자'
나도 모르게 하는 차별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창비 / 2019년 7월 17일 (출처: yes 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76470464)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을까? 최근 사회적 문제를 주목해 보면 노키즈존, 장애인 지하철 시위, 성 이슈 등 사회적 약자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갈등이 있다. 공통점은 사회적 인식에서 비롯한 차별이 원인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현재 차별과 갈등 속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표면적인 차별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세상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가는 ‘결정 장애’라는 언어 속에서 차별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례를 시작으로 차별이 생각보다 깊숙하게 자리했음을 말한다. 결정 장애란 갈팡질팡하여 선택지 속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은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것은 부족함, 열등함을 뜻하고 이는 늘 장애인이 부족한 존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작가는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차별은 무의식적이고 관습적으로 일어난다고 짚으며 의도가 나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차별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이 책은 보이는 질서를 넘어 다른 관점으로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도 책을 읽기 전,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되어 이에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대우는 공정하다.’ 이 문장은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문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대학으로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은 보상이며 낮은 사회적 지위는 개인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작가는 능력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능력 평가 기준이 과연 누구에게나 공정한가를 작성했다. 한 회사의 채용 기준이 비장애인만을 고려하였다며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 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직종별 평균 임금에 표를 제시하여 여성 비율이 높을수록 업계에 평균 임금이 줄어든다는 것을 증명했다. 남성 비율이 높은 직종을 가진 남성과 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을 가진 여성의 임금 차이 격차를 말하며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고 서술했다. 이렇게 작가는 여러 사례를 가져와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한 의문의 가려움을 긁는다.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유머는 사회적 권력과 직결되어 있어 유머의 힘에 차이가 있다는 부분이다. 상호 비하의 시점에서 ‘김치녀’와 ‘한남충’이라는 단어의 관계는 쉽게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는 내용이 있다. 작가는 김치녀는 ‘사치를 부리며 남성에게 손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로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동에 억압적인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라고 서술한다. 반면에 한남충은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책을 읽은 후 유머 관계에서 평등을 쟁취하려는 비하성 언어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언어는 복잡한 사회적 구조와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회를 넘어 언어 속에서의 평등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언어 속에 사회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식했고, 언어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자신이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차별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선량한 마음과 차별적 인식을 별개로 두어 마음만으로는 차별주의자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차별을 자각한 사람이 있다면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 구조 속 차별을 알고 싶은 사람, 차별당하는 사람은 있으나 차별하는 사람은 왜 없을까에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 책을 추천한다. 강민지 기자
제 716 호 바다 위의 몽상가
이곳은 부산광역시 광안리로 부산 여행의 필수코스로 꼽히는 곳 중 하나이다. 사진 속의 한 남성은 한가로운 오후 5시에 자전거를 이끌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신만의 깊은 여유를 만끽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촬영하던 와중 시야에 우연히 들어온 이 장면은 바닷가 배경과 그 위를 걷고 있는 남성의 여유로움과 평화가 돋보인다. 매번 바쁜 삶에 치여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일을 수행하고 한없이 앞만 보고 달리며 살다보면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물론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고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 남부럽지 않게 떳떳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가 있는 시간, 장소, 지위 등에서 얼마만큼의 만족감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학우 여러분도 하루를 살고 내일을 내다보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꿈과 희망을 품을 자신에게 바다의 고요함이라는 꿈 속으로 빠져들어 여유를 갖고 잠시 쉬어 가보면 어떨까? 양시원 기자
제 716 호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어느 가족>
[영화로 세상보기] 영화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 2018 일본 도쿄 변두리의 어느 마트, 한 남자와 소년이 자연스럽게 장을 보는 시늉을 한다. 이윽고 수신호와 눈빛으로 싸인을 주고받더니, 남자가 주위의 시선을 가로막는 사이에 소년이 물건을 가방에 집어넣어 마트를 빠져나온다. 절묘한 타이밍과 순발력으로 도둑질에 성공한 두 남자는 고로케를 사 먹으며 집으로 향하는 도중, 가정폭력으로 버려진 5살 소녀 유리를 데리고 온다.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기는 순간이다. 영화 《어느 가족》은 이들이 가족을 이루는 과정과 생계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가족》은 가족처럼 생활한, 하지만 진짜 가족으로 살았던 ‘가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가족의 구성원과 삶이 예사롭지 않음을 드러낸다. 실업 연금으로 생활하는 할머니 시바타를 중심으로, 건설현장 일용직인 오사무와 세탁공장 노동자 노부는 부부로 살아간다. 여기에, 할머니의 손녀인 유흥업소 종사자 아키가 있고, 길거리를 떠돌던 소년 쇼타와 막내 유리가 함께 생활한다. 이들은 작은방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지만, 사실 누구도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다.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과거를 뒤로하고, 서로의 부족과 결핍을 채워주며,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가족》은 가짜 가족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아동학대, 가난, 노숙자, 실업, 가족의 부재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화는 중요한 키워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스위미’(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참치를 물리치는 이야기)로 대표되는 ‘연대’의 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공감’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가족의 의미가 ‘피와 혈연으로 뭉친 집단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형식에 틀에 얽매인 공동체보다는 같은 피가 섞여 있지 않더라도 ‘사랑과 관심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인가에 대한 질문을 이 영화를 통해 물어보고 있다. 여러분도 이 영화를 보고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을 잠시 가져보는게 어떨까? 장원준 기자
이 사이트는 자바스크립트를 지원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