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0 호 [책으로 세상보기] 프랑켄슈타인(1818)
지은이 : 메리 셸리 출판사 : 문학동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생명은 사전적으로‘생물로서 살아 있게 하는 힘’이라고 정의된다. 생물은‘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라고 사전에 나타나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전적으로 정의내리지 않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생명은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다. 그 주어는 인간과 동물, 식물 모두 해당된다. 그렇다면 메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의 생명은 과연 아름다울까. ‘생명 존중’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논리였다. 동물은 인간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동물의 생명 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생명을존중하는것도‘, 인격’을 가진 생명체에만 해당했다. 그럼 인격을 가진 생명체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배제된 인간이 매우 많다. 유색인종, 하층민, 노예,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은 해당하지 않는 인간이다. 생명의 범위는 풍선처럼 그 범위가 축소 혹은 확대되기를 반복했다. 이것은 배제와 혐오의 기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이하’인사람들, 혹은 ‘생명’의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는 까닭은 생명의 범주를 인간이 정 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혐오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의 괴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형태로 창조되었고, 어떠한 보호도 없이 홀로 내던져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정의할 시간과 능력도 부여받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진 것이다. 과연 괴물이 행한 폭력의 책임을 전적으로 괴물에게 돌릴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에서의 괴물은 자연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생명을 지니고 있다. 괴물은‘생물’일까. 현실로 돌아와서, 인간이 만들어낸 AI은 과연‘생물’일까. 아직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 수준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창작물 속의 기술은 점점 현실로 다가 오고 있다. 예컨대 영화 ‘에이리언’, ‘ 매트릭스’에서 인간을 지배하게 된 AI 들은 감정은 몰라도 사고하며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생물일까.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간의 감정은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며 생명 또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나왔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야기 한 관념론도 그저 과학적 반응에 불과하며 이들의 행위, 생각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실재하지 않는 과학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 인간의 창조주가 누구인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기존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인간도 AI, 괴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윤리와 도덕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이고 생명이 생명이 아닌 것이 된다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 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명존중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행위이며, 행위는 학습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이 원리가 위와 같이 밝혀진다면 왜 지켜야하는 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을 넘길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유기체를 창조하고 생명의 범주를 변화시키는 일이 현실이 되기 전에 사회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외치는 과학적 행위에는 인문학적인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해람 기자
제 670 호 [독자마당] 우중(愚衆)에서 대중(the popular)으로
<문학과 대중문화>-황선애 교수 첫 만남 황선애 교수님의 ‘문학과 대중문화’는 아껴둔 초콜릿 같은 강의였다. 강의평가도 좋고 수업내용도 평소 관심 있던 분야라서 막 학기에 들으려 아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함께 아껴두고 있었던 만큼 강의는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 강의 방식 초기 수업은 강의식으로 진행된다.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 덕분에 대중문화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강의식 수업이 몇 주 이어지다 중간고사를 전후로 학생들의 발표도 함께 병행하게 되는데 발표는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받아 한다. 발표를 하지 않은 학생들은 학기말에 비평문 과제로 대체한다. 의무적인 발표가 아닌데다 주제도 수업 범위 내에서 본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서인지 발표에 쏟는 학생들의 열정이 남달랐다. 나 역시 ‘덕후를 찾습니다.’ 코너에서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에 대한 발표를 맡았는데 좋아하는 주제를 발표한다고 생각하니 준비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면 학생들의 Q&A 시간이 이어지는데 질문을 꺼리는 학생들의 특성(?) 때문에 질문을 할 경우 가산점이 있다. 가산점으로 인해 간혹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거나 작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공격적인 질문도 발생하지만 대체로 교수님의 적절한 조율 하에 건강한 토론이 이어진다. 발표 이외에도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거나 교수님의 질문에 문답하는 등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의 열린 수업이 주로 진행되었다. 또 수업 마지막 주에는 그동안 제출되었던 비평문 중 일부를 공유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 3 POINT 이 강의를 특별히 ‘멋진 강의’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① 이론과 활동의 균형 대체로 교양 강의는 이론적인 지식 위주의 강의이거나 활동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강의들이 대부분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강의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 강의의 특별한 점은 이론과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켰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이론과 활동의 비율은 거의 50:50으로, 균형 잡힌 수업이 가능했다.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강의식 수업의 단점과 이론적 바탕이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는 활동 위주 수업의 위험성을 모두 보완할 수 있었다. ② 세상을 보는 관점의 확대 강의에서는 주로 대중문화를 보는 관점과 대중문화와 문학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동안 대중문화를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소비만 했던 이들에게 대중문화를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간은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론적 바탕으로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틀’을 갖출 수 있게 하는 수업이었다.점점 ‘취업학교’처럼 변해가는 대학수업 속, 비판적인 시각을 향유한 지식인을 양성하는 대학 본연의 취지에 충실한 수업이라고 생각되었다. 영화를 감상하거나 발표를 들은 후 진행된 심도 있는 토론도 넓은 관점을 가지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다른 이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나눌 수 있어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다만 가끔 공격적인 질문들이 있고 발표를 자주하는 사람들이 정해져있다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는데,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별 토론’의 방식을 생각해보았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양 강의의 장점을 살려 조별로 여러 의견을 깊이 있게 나누는 조별 토론의 방법을 적용한다면 공격적인 질문들도 줄어들고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③ 교수님의 열정과 섬세함 앞서 다양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가장 매력적이고 빛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수님의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늘 정확하게 지켜주시는 수업 시간과 꼼꼼하게 준비된 수업 자료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절로 경건하게(?) 수업에 임하도록 하였다. 사실 교수님께서 엄청난 화술을 구사하시는 달변가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열정적인 수업을 찬찬히 듣고 있으면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그대로 느껴져 어떤 말씀을 전달하고 싶으신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화려한 강의 실력보다도 수업을 향한 열정과 준비성이 좋은 강의를 만드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열정이 크다고 해서 섬세한 부분들이 무시되었다면 결코 이 강의를 좋은 마음으로만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님께선 열정과 비례하는 섬세함으로 점수에 민감한 학생들의 심리, 또 남녀갈등이나 세대갈등과 같은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 수업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 받는 학생들을 모두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해 주셨다. 섬세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뜨거운 열정에 작은 부분까지 일일이 신경써주시는 교수님의 섬세함이 더해져 멋진 강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줄 정리 누군가 이 과목을 추천하는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비판의식이 결여된 채, 수동적으로 세계를 대하던 현세대의 대학생들에게 경종이 되는, 교양수업다운 교양수업”이라고 말할 것이다. 교수님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중우(衆愚)’가 될 뻔 했던 대학생들을 능동적이고 현명한 ‘힘 있는 대중’으로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위 글은 '내가 수강한 멋진 강의 에세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국어교육과 4학년 이강현 학우의 글입니다.
제 670 호 [기자석] 편집장의 편지
이해람 기자 올해『상명대학보』의 편집장이라는 직함을 받고, 그에 알맞은 책임을 처음 짊어졌을 때 학보를 읽는 독자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기자석’자리를 빌려『상명대학보』의 지면을 채워나갈 사람으로서 학교와학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이제야 2019학년도의 첫 신문이 발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할 이야기들이 조금은 성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대학사회의 위기’라는 평가와 함께 ‘학보사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따라서 학보사의 정체성과 방향의 논의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5월 리더십캠프 외유 논란이 ‘에브리타임’에서 쏟아져 나왔을 때 ‘교내 언론은 도대체 뭘 하느냐’는 게시물이 올라왔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필자가 리더십캠프 외유 논란을 취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글은 취재의욕을 크게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학보사의 일원으로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독자들의 눈에는『상명대학보』가‘대학에서 언론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는 신문으로 보였다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사회는 분명한 위기를 맞이했다. 한국대학학회장이‘대학이 폐허가 되었다’고 말하는 등 대학 위기 담론은 2017년 필자가 처음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대학 학보사는 물론 중앙언론의 기사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수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하거나‘따뜻한 도서관’을 위해 교직원의 생계를 외면하는 등 학내 구성원들의 상생을 좇지 않고 있으며 문화를 선도하던 대학가 문화는 소멸해가고 있다. 과연 누가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 청년문화의선구자’라고부를까. 학보사 또한 이러한 위기를 공유하고 있다. 대학사회 안에서 공생하는 학생과 학보는 큰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만 명이 넘는 재학생 중 몇 명이나 학보를 읽을까. 캠퍼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판대에는 예전에 배포된 이전 신문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짜장면 먹을 때라도 신문을 가져가줬으면 좋겠다”는 후배 기자의 한 마디에 학보의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학보사가 질 높은 기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년 간 학보사에 있으면서‘내가 과연 건강한 사명과 책임을 가지고 기자생활을 해왔을까’라고 되돌아본다면 남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것이다. 대학생의 시선으로 세상과 대학에 필요한 물음들이 학보에 녹아들어 있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두 번째는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소비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튜브,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이‘정보의 바다’가 되어 담론을 형성해나가고 있을 때 학보사는 함께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페이스북의『상명대학보』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드문드문 올라오는 공지 글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학에서 언론이 건강하게 기능하고 있는 학교들을 공통적으로 웹진과 SNS를 운영하고 있고, 기사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실시간으로 피드백 한다. 이제야 웹진이 생긴『상명대학보』의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하다. 위기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된다. 위기를 반성했다면 이를 시정하는 것이 필요 단계이다. 먼저 기자들이 대학과 언론에 대한 깊은 고민을 기사에 담아내고, 이를 독자들에게 익숙한 공간에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존 종이신문에서 다루던 텍스트를 독자들의 수요에 맞출 수 있는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하는 노력도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사회적으로도, 우리 대학에도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작년 68혁명 50주년에서, 올해 3.1운동 100주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입시제도의 변화, 대학교육 구조 개편 등 대학의 모습 또한 전국적으로 바뀌고있다. 우리 대학의 학생자치에 관해서는 서울캠퍼스에 3년 만에 총학생회가 들어섰다.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한 제2캠퍼스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학생은 변화를 논의하는 광장의 중심에서 벗어난 경험이 없다. 68혁명은 ‘대학생이 중심이 되었다’는 수식이 붙고, 3.1운동 또한 학생대표의 만세삼창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화에 불을 붙인 것은 언론이었다. 침체되어가고 있는 대학사회를 공유하는 우리 대학은 이를 역행하듯 학생자치를 싹틔웠다. 이를 기점으로 대학문화가 활력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상명대학보』가 학내 구성원들의 광장이 되길 기원한다.
제 670 호 [교수칼럼] 신입생에게 들려주는 개구리 이야기
국어교육과 최홍원 교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난데없이 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니, 시작부터 낯설고 의아할 수 있다. 힘들고 고단한 입시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선 신입생들, 그리고 24절기 가운데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그 사이에 ‘개구리’가 있다.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개구리는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꺼내기에 알맞은 대상인 것이다. 개구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연령대에 따라 개구리를 잡고 놀았던 추억을 지닌 이가 있는가 하면, 실물보다는 만화 속 캐릭터가 더 친숙한 이들도 있다. 독특한 외모와 울음소리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주로 인해 개구리로 변했다는 설화가 서양 곳곳에 펴져 있고,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는 이 같은 사유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작품이 된다. 먼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오지만, 물을 서서히 데우게 되면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져도 변화를 모르다가 결국 죽게 된다는 실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물론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와 다른 실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흔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로 비유되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은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놓치게 되면 결국 화를 당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대학생활의 낭만에만 빠져서 천천히 끓고 있는 물을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둘째, 바깥 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여기서 개구리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표적인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정작 개구리의 상대역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개구리에게 넓은 바깥 세상을 이야기하는 이는 바로 동해의 거북이다. 천리의 거리, 천리의 높이로도 크기와 깊이를 형용하기 어려운 곳이 바다라고 한다.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곳, 그곳이 바로 바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좁은 우물을 박차고 넓고 넓은 바다를 향해 힘찬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다음으로 우리 고전으로 옮겨가면 개구리는 또 다른 화두를 던져준다. 오늘날 개구리는 불법 포획이 금지될 만큼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만, 이전에는 잠 못 들게 하는 소음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잠을 깨우고 잠을 못 들게 했던 만큼 옛 사람들이 개구리 울음소리에 반감을 드러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게 된 사연도 여러 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인조의 측근이었던 장유(張維)는 시끄러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서 그것이 제 본성대로 우는 것임을, 그리고 그 울음이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 낸다.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보고 듣고 먹기에 즐거운 사물은 마음껏 이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애려 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큰개구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김수항(金壽恒)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면, 인간이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고 온갖 가식과 허위로 뒤덮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점을 동시에 취해야 함을 들려준다. 그리고 나의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일깨운다. 이옥(李沃)은 이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떼를 지어 모이면 소리가 나는 만큼,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런데 찬찬히 다가가서 하나하나 들어보면 한 마리가 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고 감정도 배어 있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뭉뚱그려 소음으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연과 감정을 읽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내뱉는 말과 사연을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대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뭉뚱그려 소음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하나의 애환에 귀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소음들로 가득하지만, 관심과 애정이 더해지면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존재가 내는 특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와 같은 속담처럼, 개구리는 여러 관용구에 인기있는 대상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만큼 개구리는 우리 삶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여러 가치와 교훈을 전해주는 대상이 되어 왔다. 신입생 여러분들에게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대학 생활은 여러분에게 쉴 틈없이 ‘끓는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여러분을 좁은 우물에서 넓은 바다로 끝없이 밀어내기도 할 것이다. 이를 단순히 개구리에게 국한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여 ‘공간을 파괴하라!(stretching space!)’, ‘지식을 재신임하라!(retrust knowledge!)’고 외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주장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생활은 그동안 입시에 매몰되면서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폭넓게 바라보고 다르게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나의 편견과 아집 대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은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삶에 담긴 고민과 사연에 귀 기울이면서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경험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에게 개구리는 어떤 대상이며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를 묻는다. 상명의 가족이 된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하면서 이것으로 그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제 670 호 [사설] 내 안의 빈 공간, 감동의 시작
밥 중에 배고플 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 배가 부르면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질을 멈출 수밖에 없는 법이다. 밥맛은 본래 그런 것이다. 이 묘한 관계를 다른 일에도 대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업을 듣는다든지 과제를 할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기가 밥맛을 돋우듯, 수업과 과제에 대한 흥미를 돋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채움을 기다리는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열정을 뜻한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마음속의 공간 말이다. 이 마음은 빳빳한 마분지가 아니라 얇은 습자지와 같아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이든 잘 빨아들일 수 있다. 혹여 질기고 억센 막이 내 마음의 문을 막고 있다면 그 딱딱함을 걷어내고 미세한 바람에도 일렁이고 잔잔한 습기에도 젖을 수 있는 부드러움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끊임없이 지성과 감성의 샘물을 찾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과 감성의 샘물 맛이 더 차고 맛있게 느껴지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그 목마름과 굶주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목마르고 굶주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새 학기가 되면서 신입생과 재학생들이 강의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바쁘게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수강 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과제를 제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마음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공부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가 대학 생활의 전부는 아니므로 공부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철학적 고민도 필요하고, 때로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문학은 내가 사는 세상을 풍요롭게 확장시켜 줄 것이고, 예술은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는 힘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빈 공간이 넉넉해야 한다. 그 공간이 있어야 주변의 것에 대해 호기심도 생기고 소중히 품을 수 있는 나의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그래야만 내 안에 그 모든 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치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듯이 담아낼 수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빈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비워야 한다. 교만 속에서 싹튼 껍데기에 불과한 명예심이나 나만 잘 되고자 하는 이기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나인데, 남에게 잘 보이는 싶은 마음 때문에 가식적인 모습으로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속의 갈등으로 인한 잡다한 소음과 세상적인 욕망의 속삭임에 현혹되어 나다운 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나는 부족한 것이 없기에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거나 나는 가망이 없고 여전히 안 될 거라는 지나친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하려면 내 안에 빈 공간이 많아야 한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성령에 대한 사모함이 절절하고 진정한 학생이라면 배움에 대한 갈망이 넘쳐나고 진정한 교수라면 학문과 교육에 대한 바람이 남 다르다. 우리 대학교의 인재상은 “감동을 주는 혁신형 인재”이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면 내가 먼저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혁신이라는 과제의 시작은 바로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는 아주 본질적이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 문물의 빠른 변화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어렵고 뭐가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정신적 유대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내 본연의 느낌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내가 느끼는 배고픔은 어제의 배고픔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배고픔이기에 이를 해결할 음식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마찬가지로 내가 호기심과 소중한 것에 대한 도전에 굶주려 있을 때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공부와 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며 성취하게 된다. 거기엔 어떤 세속적인 욕심이 개입하지 않는다. 순연한 목적에 의해 추구하는 노력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이란 바로 그런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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