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2 호 [편집장의 시선] 자치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2018년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분권’으로 시끄러웠다.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중앙정부의 정치적, 재정적 구속력을 문제 삼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올 겨울 지역신문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인턴기자를 하며 마주한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모습은 그들이 과연 ‘자치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들게 했다. 지역민들이 구청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자 지자체는 풍물패를 동원하여 방해했다. 그 후 주민간담회에서 구청장의 “당신들이 나를 뽑았다. 4년 후에 알아서 하라”는 말은 취재기자들의 얼굴에 실소를 띠게 만들었다. 구의회 본 회의에서는 거수투표를 진행할 때 찬성과 반대에 동시에 투표한 의원이 있었다. 그리고는 같은 당원끼리 “어디에 거수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지자체의 불통과 무능은 ‘지방분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만 남게 만들었다. 자치도 ‘자격’을 갖춘 이들이 맡아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자치도 마찬가지이다. ‘먹고사니즘’에 지친 학생들이 자치에 무관심해졌다는 것은 핑계이며, 자치를 책임진 사람들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다. 학생자치를 이끄는 이들이 과연 ‘자치의 자격’을 가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9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고 학생자치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학생복지팀과의 간담회가 열려 학생자치기구와 학교의 소통이 시작되었고, 대의원회에서 학생회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며 학생자치기구별 회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생자치의 길은 멀고도 험한 듯 하다. 학교에서의 질문은 말라버렸다. 몇몇 학생자치기구의 간담회, 수많은 대의원이 참여한 총회에서 질문은 ‘가뭄 상태’와 다름없었다. 정말 학교는 아무런 문제없이 완벽할까. 질문 없이 침묵을 고수하는 조직은 성장할 수 없다.간담회 준비가 미흡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었다. 몇몇 학생자치기구는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제시했을 공약들에 대한 사전지식과 정보가 매우 부족했다.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의미가 없다. 간담회 역시 학생복지팀의 “안 된다” 혹은 “구체적인 자료와 방안을 준비해오라”는 말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한 채 흘러갔다. 4월에 있을 총장 간담회까지 이렇게 진행된다면 학생생활이 과연 변화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편 학생과 학교가 소통할 수 있는 자리의 협상 테이블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보와 권력의 불균형은 학생자치가 온전한 형태를 띠지 못하게 만든다. 학생자치기구에서 학생들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려면 학교의 검토가 필요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학교를 설득해야만 한다. 이들이 ‘자치의 자격’을 갖추려면 자체적인 역량강화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모든 자치기구가 구성원들의 관심과 지지를 기반으로 하듯, 학생자치기구에게 학생들의 관심과 지지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역은 집행부와 의회의 자치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자치’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도 자치기구와 학교만의 탁상공론에서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생자치’로 변모해야한다. 이해람 기자
제 672 호 [교수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오성호 교수 (공공인재학부) 인간은 항상 꿈을 꾼다. 무한한 희망과 행복을 주는 길몽, 몸서리치게 겁이 나는 악몽..... 꿈 하나. 먹고 살 것이 없었던 1960년대 어느 해 1월1일에 한 만화가가 어린이들이 보는 잡지에 21세기의 희망을 그린 만화를 그렸다. 잡지를 펼친 어린이 눈에 그려진 미래세계는 그야말로 풍요와 즐거움의 세계다. 사람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해야 할 생산활동은 기계가 다 해준다.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자원, 심지어 에너지도 과학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은 편히 삶을 즐기면 된다. 그 옆에는 충실한 로봇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어린이 눈에 가장 남는 장면은 제주도 목장으로부터 우유가 수도관을 통해 모든 가정에 공급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유로 목욕도 할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을 넉넉하고 행복하게 해주던지.... 또 하나의 꿈. 1995년 4억6천만달러를 벌어들인 영화 ‘매트릭스’가 세상에 나왔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살면서 꿈을 꾼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인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인지... 주인공이 살고 있는 2199년의 실제는 인공지능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기계는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고, 움직인다. 강제로 부숴지지 않으면 영원히 산다. 그 시대의 인간은 기계가 작동하는데 필요한 생체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다. 기계(인공지능)는 인간으로 하여금 200년 전에나 있었던 먹고 마시고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꿈) 속에서 지내게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선택한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인간은 소멸한다.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깨달은 소수의 인간이 기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항운동을 벌이지만, 늘 쫓기고, 고달프고, 공포에 질려있다. 1960년대에 유토피아적인 21세기를 그린 만화는 지금 찾기가 어렵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유토피아는 아니라도 매우 낙관적인 미래를 그린 이정문화백의 만화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놀랍게도 그 만화에서 예측한 미래는 ‘달나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한 가지만 빼고는 다 이루어졌다. 전화기라기보다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핸드폰, 화상통화, 원격진료, 전기자동차, 움직이는 도로 등등... 2199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몇 미래학자가 특이점이 온다고 외치고 있다. 특이점은 기계의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는 시점이다. 이들은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에 대한 불안을 감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수적 조건인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초기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에 못지않게 직업의 내용이 달라지는데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을까 혹은 심지어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한 강연의 말미에 미래는 인류가 ‘신들과 쓸모없는 사람들’의 두 부류로 구분될 거라는 간단한 전망을 하기도 했다. 신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기계가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주는 능력을 가진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창출되는 부도 독점한다. 반면에 쓸모없는 사람들은 생산에 기여할 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잉여 인간들이다. 그래서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보는 미래학자들은,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서 인류 전체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꿈이 아닌 이야기 하나. 2019년 3월 말미에 따뜻한 봄볕과 미세먼지 사이를 거니는 많은 젊은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까? 그들은 ‘자기’와 ‘자기들’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나이 많은 인간 하나.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한가로이 남은 시간을 보내나? 아니면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까? 아비로부터는 그럴듯한 세상을 넘겨 받았는데....
제 672 호 [사설]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의 조화가 필요한 때
스포츠(Sports)의 개념은 운동의 행위에 경쟁성, 흥미성, 규칙성을 가미한 개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본능인 공격성을 감소시키고, 건전한 사회성을 함양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스포츠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관심의 폭이 폭발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스포츠는 크게 ‘SEE’의 스포츠인 엘리트 스포츠와 ‘DO’의 스포츠인 생활체육 활동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행위로 나뉠 수 있는데. 엘리트 스포츠는 국가대표급 경기, 프로스포츠 경기를 포함한 관람 스포츠를 말하며 스포츠행위는 생활체육프로그램 참여와 운동(신체의 조작적 움직임) 행위를 포괄한다. 대한민국의 엘리트스포츠 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해왔다. 과거 엘리트스포츠 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국민통합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의 우외 확보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적 측면이 강하였으나 최근의 정책은 궁극적 국민복지실현, 국민 건강 증진, 여가 활동의 방법적 차원, 프로스포츠 활성화를 통한 국가 경제력 강화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인기 구기 종목들의 프로화로 인해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 인식 증대와 시너지 효과 창출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과거 ‘SEE’위주의 스포츠 정책으로 인해 ‘DO’의 스포츠인 자신의 건강과 행복감을 향유할 수 있는 생활 스포츠 분야의 성장은 조금은 더딘 부분이 있다. 이러한 부분의 보완을 위해 최근 정부는 민주적 거버넌스에 기반한 스포츠를 통해 궁극적 복지향상에 대한 방안을 ‘스포츠비전 2030’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단의 기량이 과거 보다 많이 향상되어 축구경기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국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행하는 것도 아닌데 왜 모든 국민들은 우리 국가대표팀의 선전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엘리트 스포츠만이 제공 할 수 있는 강력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 간 스포츠 경기의 경우 역사, 문화적 환경과 결부되어 경쟁심과 즐거움이 배가된다. 필자가 대학 신입생이었던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었던 ‘FIFA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한국은 수십년 만에 일본에게 패했다. 본선진출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는 듯 했으나 일본 국가대표팀이 최종전에서 종료 10초전 이라크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최종전에서 북한에 승리한 대한민국은 천신만고끝에 본선진출권을 거머쥐었다. 대한민국은 최종전에서 북한에 3:0으로 승리하고도 매우 침체되어 있었으나 타 경기장에서 진행된 일본과 이라크의 동점 경기 결과를 접하고 온 국민이 환호하였다. 이것이 바로 ‘도하의 기적’이다. 반대로 일본 입장에서 보면 ‘도하의 비극’ 이 되는 것이다. 이후 아이러니 하게도 그 동점골을 성공시켰던 이라크의 ‘자심’선수는 현 서울FC의 전신인 유공 축구단에 스카웃이 되었다. 이렇듯 스포츠 경기는 국가의 위상, 애국심과도 결부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근래 미국 메이저리그 로스엔젤레스 다저스팀의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는 약간의 부상이 있긴 했으나 쾌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체 프로리그인 ‘KBO’를 운영하고 있어 야구를 좋아하는 팬층이 다수 확보되어 있고 선수들의 기량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변위에 야구팬들은 류현진 선수의 활약을 보면서 직접적으로 MLB리그의 수준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은 대한민국 야구 기술 수준 향상, 관중증가, 시장 창출을 통한 국가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게 된다. 요즘 대학생들은 학업, 취업 고민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수업, 과목별 과제학습, 취업을 위한 역량개발 등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적 차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부분을 완벽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적 차원이 바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스포츠는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순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람 스포츠를 즐기면서 자기가 선호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고 또한 몰입하는 것 그리고 스포츠 동아리 참여를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신체적 강건함을 유지하며, 사회성을 함양하는 것은 대학생들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울러 생활체육의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제 672 호 학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 - 모두들 '달라달라'
학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 - 모두들 '달라달라'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전국 각지에서 통학, 기숙사, 자취의 다양한 등교 방법을 이용하는 학생들. 그들의 에피소드와 다양한 주거형태의 장단점을 함께 들어보자! 김수인 기자 최정원 기자
제 672 호 [책으로 세상보기] 한 스푼의 시간 (2016)
지은이: 구병모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세상에 스며든 로봇 어쩌면 인간이 없는 세상보다 로봇 없는 세상이 더 현실감 없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없이 못 사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고, 인공지능 스피커는 이름까지 불리며 대화 상대가 된다. 로봇 청소기는 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애착을 받아, 고장이 나더라도 버려지기보다 수리받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무인 인공위성이 우주를 쏘다니는 것을 보면 인간 없는 세상은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한 스푼의 시간’ 속 동네 세탁소 주인 명정은 아내와 외동아들이 먼저 떠난 자리를 쓸쓸히 지키며 살아간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유학을 떠나 이민까지 가고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에게 때늦은 택배를 받는다.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열일곱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아니 그처럼 생긴 로봇이다. 명정의 아들이 연구하던 인공지능 로봇의 샘플로, 아들의 죽음과 회사의 도산 이후 떠돌아다니다가 명정에게까지 흘러온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어색한 티가 조금 나지만 제법 사람 구색은 갖추었다. 로봇이 아들 얼굴과 겹쳐 보이는 명정은 로봇에게 ‘은결’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은결은 명정의 세탁소 일을 도우며 함께 살아간다. 세탁소에 사람 노릇을 하는 로봇이 등장하자 동네 사람들은 낯설어하면서도 금세 익숙해진다. 은결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점차 적응해간다. 나는 이 모습이 인간의 사회화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사회화’에는 ‘인간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 생활하도록 기성세대에 동화함’이라는 뜻이 있다. 물론 은결은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그에 대해 사고하였다. 일종의 시스템 처리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은결은 인간의 삶을 학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노화과정을 거치지만 로봇은 부품을 교체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세주가 아기를 낳아 키우고, 꼬마였던 시호와 준교가 성인이 되고, 명정이 숨을 거둘 만큼 시간이 흘러도 은결은 변한 것이 없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은결과 분명 달랐다. 명정은 은결에게 시간에 대해 말했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은결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아니다. 시호와 준교도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손녀를 돌보는 은결은 이제 교체할 부품도 없는 구식 로봇이 되었다. 사실 은결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었다. 명정이 숨을 거둔 뒤 이불빨래를 하다가 넘어진 은결을 준교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은결 역시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비눗물에 몸이 젖고 눈앞이 까매지며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는 것을 은결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세제 한 스푼처럼 스르르 사라진 명정을 뒤따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명정은 인간이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세제가 가진 힘에 주목하고 싶다. 고작 한 스푼의 세제는 순식간에 물에 녹아 사라지지만 빨랫감에 스며들어 때를 쏙 빼준다. 그렇다면 로봇은 섬유 유연제 한 컵쯤 되지 않을까 싶다. 빨랫감에 스며든 세제는 물에 헹궈져 사라지지만 섬유 유연제는 바짝 마른 빨래에서 은은하게 향기를 풍긴다. 명정은 세상을 떠났지만 은결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봇은 이미 세상에 스며들었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깊게 말이다. 홍연주 기자
제 672 호 [상명만평] 항공사 회장님들
황인선(만화·3)
제 672 호 [독자마당]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김보름(문화예술경영·3) 이 글은 한국국제협력단 사업으로 진행된 2018년도 2학기 “영상으로 보는 국제개발협력 이슈” 교과목 수강생 중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선발되어, 2019.01.19.~2019.01.27.(6박9일) 기간 동안 탄자니아 탕가(Tanga)지역 및 차니카(Chanika)에서 현장활동을 수행하고 돌아온 후의 소감이다 봉사란 무엇인가? 봉사(奉仕)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 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사전적 정의에서 보여지는 핵심은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희생과 봉사를 동일시해왔다. 나 역시 단순하게 봉사정신이란 곧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희생정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던 중, 탄자니아에서 하루의 봉사일정이 다 끝난 뒤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 식사자리에서 교수님은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만의 봉사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더불어, ‘봉사가 꼭 힘들고 괴로운 것일 필요는 없다. 내가 즐거운 것이 봉사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봉사는 나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면 안 돼. 무조건 나의 편안함과 행복은 후순위야.’ 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봉사활동에 와서 나의 개인적인 편의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죄악인 것 마냥 여겨지던 생각들에 균열이 생겼다. 돌이켜 보니 이유없는 죄책감은 정말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불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봉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봉사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단순한 명제에 맞춘 편견이었다. ‘봉사란 희생이다. 그러므로 희생이 아닌 것은 곧 봉사가 아니다’는 명제로 치환된 단순 정의일 뿐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봉사란 무엇일지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전까지 봉사의 필연적 요소는 자기희생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필연적인게 아니었다. 봉사자인 내가 행복해야 주위사람들도 행복한 에너지와 기운을 전달받는 것이었고, 내가 즐거울 때 비로소 봉사라는 행위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희생이란 어쩌면 불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봉사란 함께 잘 살기 위한 일이 아닌가. 더불어 봉사자를 곧 희생자로 치환해왔던 내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자들이란, 반드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다른 봉사자들을 볼 때, 그들에게 희생을 당연스레 요구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머물렀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봉사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봉사의 정의란, ‘함께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행하고 참여하는 행위’이다. 결국 봉사의 본질은 함께 행복하고 함께 잘 살기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사정신이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 이 아닌, '모두가 함께 공존하며 같이 행복하기 위해 힘을 합쳐 애쓰는 정신'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글로벌화된 현대사회에서 봉사정신이란 과연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일까, 세계시민인 우리가 가져야 할 봉사정신은 과연 과연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정신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정신이 정말 온당하고 타당한 것일까? 결국 우리의 봉사라는 것은 ‘함께 잘 살기 위해 함께 협력하고 협치하여 결국 공공의 이익에 대해 선순환을 이룩하는 일체의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다 함께 행복한 것이 우리가 결국 원하는 목표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봉사의 의미이자,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내가 봉사의 정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곤 하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 때문이었다. 빈곤포르노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그리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편집하는 자료들을 말한다. 아프리카의 빈곤문제를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 사람들도 ‘동등하게 생활을 영유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포함된다. 지금껏 매체에서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여줄 때, 대부분 굶어서 영양실조가 심각한 사람들, 야만적인 환경과 비위생적인 관념아래 살아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아프리카의 전부인 마냥, 그들이 곧 아프리카인 것 마냥 보여주었다. 이러한 빈곤포르노와 미디어의 행태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우리보다 열등하고 하등하며 불행한 존재, 그렇기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고착시킨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지속된 자극에 금세 무감각해지는 소비자들 덕에 자극적인 연출과 내용은 그 강도가 더욱 거세어지는 악순환을 가진다. 더불어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는 채로 자극적인 정보만을 주입받는 수용자는 그 프레임을 그대로 장착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이 형성되고 고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주홍글씨처럼 짙게 남아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곤 한다. 아마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미디어와 빈곤포르노의 영향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그렇기에 처음엔 아프리카에 직접 간다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고, 아프리카에 대해 떠올릴때면 영양실조가 심각한 아이들과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인 환경아래 살아가는 그들을 자연스레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본 탄자니아의 모습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야만적이지도, 삶이 곧 끝나갈 것처럼 빈곤하거나 위급하지도 않았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부 나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활을 영위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더불어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꽤나 잘 사는 편에 속하는 국가였다. 특히 다리에스살람 공항에 도착하여, 차를 타고 탕가마을로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7 시간을 내달려야 하는 긴 이동시간 동안 버스 창문 너머를 구경하던 중, 커다란 나무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문득 궁금해졌다. 살아가는 환경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이 대화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 헤겔과 칸트 같은 류의 철학적 담론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잇달았다. 우리가 흔히 지적인 대화라고 일컫는 종류의 대화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대화가 우리의 대화보다 열등할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유명 철학자들의 철학과 다양한 교육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운 부모와,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지라도, 자신들의 인생의 철학과 지혜로 아이를 키운 부모. 우리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부모라고 감히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가? 더 고차원적인 지식이 내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자의 부모를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삶이 불행할 것이라 생각한 건 모두 나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아니 이는 선입견을 넘어, 그릇된 고정관념이자 크나큰 실수였다. 편견, 선입견은 모두 볼 견(見)자가 들어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바르게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가서 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본다는 행위란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을 넘어서서, 나만의 관념과 철학을 통해 세상을 수용하고 고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인생의 경험들을 통해 내 가치관과 생각들을 정립하며, 쌓아온 가치들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사유하며, 많이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많이 보고 경험해야만 선입견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많이 듣고 사유해야만 비로소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활동을 통해 나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서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만의 가치로 바라보고, 숨어있는 진짜 문제들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올바른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 말이다. 광고기획이란 결국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솔루션을 제시하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앞서 먼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점철된 시야는 진짜 문제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 것 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책 '오만과 편견' 에서는 “오만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편견은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탄자니아 현장활동은 나로부터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에 대해 한 발짝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기회였다. 비록 넘지는 못했을지 언정, 적어도 무엇이 편견이고 선입견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경계하며, 올곧은 시야를 가지는 기획자가 되고자 한다. 덧붙여 다른 사람들도 함께 세상에 대해 바른 시각과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기획자가 될 것이다.
제 671 호 [독자마당] 이해와 공감의 오인, 젊은 꼰대
유 승 현(역사콘텐츠학과·3)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인 정문정 작가의 말이다. 예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했겠지만 지금은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꼰대라는 단어가 늙은이, 기성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다면 요즘에는 그들만큼이나 나이대가 엇비슷한 또래 꼰대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필자는 특유의 허세와 과시로 무장한 그들을 대하는 게 불편했고, 머리로 이해하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본인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남는다. 꼰대는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기에 ‘젊은 꼰대’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불치병 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꼰대를 싫어하면서도 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대학생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꼰대의 특징을 꼬집은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술만 마시면 시도 때도 없이 ‘나 땐 말이야~’라며 군대 얘기를 시전하는 복학생, 과도한 예절과 서열 중시를 강요하는 꽉 막힌 선배, 타인의 개인사에 지나치게 관심 가지고 훈계하려는 동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20·30대 젊은이들이 젊은 꼰대가 되는 건 태생적으로 내재된 본인의 성향일 수도 있고 각박하고 치열해진 사회 분위기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그 다름을 문제시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한술 더하면 그들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바로잡아주려고 도 넘는 참견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글의 서두에서 정문정 작가가 이야기한 공감능력의 부재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적인 배경과 대학생에서 사회 초년생을 거치는 상황적 배경을 고려해봤을 때, 젊은 꼰대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먼저 또래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강하다는 점이다. 자신은 험한 입시,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앞가림도 나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자기보다 낮은 학벌을 가지거나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친구들을 답답하고 불쌍하게 여기며 스스로를 성공한 인생 우등생이라고 자부한다. 그들에게 남들이 현재 어떤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디자인하는지 보단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요소들을 잣대로 본인이 그들보다 앞선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아가 마치 본인보다 아래라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교화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의무감에 젖은 채 행동하는 것 같다. 둘째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꼰대짓에 진심을 담는다는 점이다. 본인은 다른 사람에게 교훈, 가르침을 주려고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여기는데, 물론 의도야 좋겠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은 본인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충고, 애정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대다수의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인간관계란 축적된 시간의 양이 많다고 마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상대방의 모든 것을 정확히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설령 본인이 정말 맞고 상대의 행동이 틀리다고 해서 이를 지적할 때 그 결과가 좋을지도 항상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이와는 별개로 ‘꼰대’라는 단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용되 행태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의미가 의미인 만큼 단어를 오용하여 자신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무작정 꼰대라고 매도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실제로 꼰대짓을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젊은 나이에 꼰대라고 낙인찍히면 그 이미지를 벗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업무상 상급자가 정당한 지시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고, 선후배 간 교류는 고사하고 화를 피하고자 서로 무관심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무엇이 꼰대 짓이다.’라고 생각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기에 그 단어를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단어의 편리성과 파괴력을 알기에 우리는 더더욱 이 단어를 애용하는 것 아닐까.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히 ‘꼰대다, 아니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있어 본인만의 대인관계 기준을 확실히 정하고 소신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이를 의식해서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지도 말고 내 주관적인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말고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절대로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 설사 내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타인의 주관에 깊숙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관심이라는 이름의 송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제 671 호 [교수칼럼] 삶의 여정과 목표
삶의 여정과 목표신입생들이 입학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대학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요? 재학생 여러분들은 학년이 올라가고 후배는 늘었는데 대학생활을 잘 꾸려가고 있나요? 친구들과 여행갈 때면, 누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짐을 꾸리지요? 대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입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 얘기해 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졸업한 고등학교까지의 생활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남들이 제공해 주는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고 공부를 하면 됐습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동적으로 쫓아가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리라 봅니다. 신입생들이 입학하고 학교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철철 넘치는 시간과 자유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입시공부하면서 꿈꾸었던 여유와 자유를 이제 얻었는데 왜 만끽하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여 있을까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해 나간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주어진 여유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 스스로 계획하고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적극적인 사고와 실천의지가 필요합니다. 입시공부 할 때처럼 수동적으로 수업만 듣는 대학생활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수업에는 수많은 조별활동과 발표가 있고, 수업 외에도 학생회·동아리·소모임 등 활동할 공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이 열려 문화적 욕구를 충족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갖가지 활동거리들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 하는지를 몰라 답답해하기 전에 1학년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면 서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자질을 일깨워 보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확립하는 것도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소통할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학생회 임원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학생들의 참여도가 급격히 떨어져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사를 못해서 걱정이기도 하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편향된 개인주의입니다. 젊음의 열정을 자기 혼자만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지 말고 동기·선후배들과 어울리는 대인관계 속에서 발산해 보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혼자 할 때보다 훨씬 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재미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장래희망이 뭐냐?’, ‘삶의 목표가 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럴 때 뭐라고 대답하나요? 보통 자기가 원하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부자가 되기까지 내 삶의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그야말로 과정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과정 한 과정이 모두 내 삶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다 내 삶이라는 얘기지요.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는 내 삶에 동기부여를 해 주고 추진동력이 되어 주지만 그것만을 향해 질주해 나간다면 힘겨움의 연속일 겁니다. 힘겨움 끝에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허탈해지거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또 다시 질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도 내 삶의 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작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어나가는 성취감을, 수시로 닥치는 힘든 일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가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의 행복지수는 한층 높아질 겁니다.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서 인증샷을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 것은 반쪽짜리 여행이지요.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에서 만나는 가지가지 인정풍물들이 여행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있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생활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스쳐지나가는 여정으로 여기지 말고 여정이면서 목표라는 생각을 가지고 젊음의 열정을 발산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나요? 혹시 대안 없이 안주하고 있거나 현실을 원망하면서 차일피일 하고 있지는 않나요? 현실의 무게가 우리 어깨를 짓눌러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한 발 두 발 내딛다 보면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샘물도 만나게 될 겁니다. 나른한 베짱이의 편안함보다는 부지런한 개미의 성취감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대학시절은 비유하자면 꽃나무의 개화기와 같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시절이 지금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의 시기이지요. 이런 시절을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만 보내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꽃을 피우려면 가장 꽃답게 피워야 그 열매도 튼실합니다. 땅으로부터 갖은 영양분을 골고루 빨아들인 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피우듯이 여러분도 대학생활을 통해서 부지런히 삶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바랍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듯 꽃다운 여러분의 청춘 여정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최상은 교수 (한국언어문화학과)
제 670 호 [상명만평] 흑백의 기적
황인선 (만화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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